신격호
신격호 한자 이름 辛格浩
신격호 영어 이름 Shin Kyuk-ho
신격호 자 취광 鷲珖
신격호 호 상전 象殿
신격호 차명 시게미츠 다케오 重光 武雄(しげみつたけお ) Takeo Shigemitsu
신격호 직업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기업활동을 하던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종종 일본이라면 무조건적 공격을 하는 단체들에게 공격을 당하여 일본 국적으로 오해받고는 했으나, 식민지 조선인 신분으로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고 일본 경제에 미치는 영향등으로 일본으로부터 특별 영주권을 발급받은 경우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롯데그룹의 창업주이자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신격호 초대회장의 차남인 신동빈 회장 체제이다.)
홀수 달에는 한국에서 머물고 짝수 달에는 일본에 머물어가면서 일 년을 반으로 나눠 그룹을 경영해 '대한해협의 경영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신격호 나이
신격호는 1921년 11월 3일에 태어나 2020년 1월 19일 향년 98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신격호의 띠는 1921년생으로 신유(辛酉)년 닭띠이다.
음력 10월 4일생으로 신격호의 주민등록상 생년월일은 1922년 11월 22일이지만,
1921년 당시의 출생신고 시스템상의 이유로 실제 생년월일은 1921년 11월 3일이라고 한다.
신격호 고향
신격호는 1921년 11월 3일 경상남도 울산군 삼동면 둔기리에서 태어났다.
現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출생이다.
인근의 조일리 , 하잠리와 둔기리는 모두 영산 신 씨 집성촌이다.
신격호 신체
신격호는 젊은 시절 키 173cm로 1921년생 빈농에서 태어난 동양인인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키가 큰 편이다.
나이가 들면서 키가 170cm로 줄었으나 상당히 호리호리하고 날렵한 체형으로 비율은 키에 비해 더 좋게 보이는 편이다.
신격호의 혈액형은 A형이다.
신격호 본관
신격호의 본관은 영산 신 씨(靈山 辛氏) 초당 공파(草堂公派) 27세 호(浩) 항렬이다.
영산 신 씨(靈山 辛氏)는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고려시대 중기 제17대 왕인 인종(仁宗)이 재임하던 시기,
중국에서 건너와 문과에 급제한 뒤에 다섯 재상 중의 하나인 정 2품 관직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낸 신경(辛鏡)이다.
매울 신 자를 쓰는 성씨는 영산 신 씨(靈山 辛氏), 영월 신 씨(寧越 辛氏) 두 본이 있으나 둘 다 같은 혈족으로 신경이 시조이다.
영월 신 씨가 작은집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에게는 신라면으로 잘 알려진 한자이며 신격호의 동생인 신춘호가 농심을 세우고 자기 성씨를 따서 지은 라면의 이름이기 때문에 신라면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신격호 가족 및 성장
빈농이었던 아버지 신진수(辛鎭洙 1902.8.25 ~ 1973.6.16)씨와 어머니 김순필(金順必 1904.2.12 ~ 1952.10.26)씨 슬하에
5남 5녀 중 맏이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동생으로는 차남 신철호(辛轍浩 1923.9.12 ~ 1999.6.9) 전 롯데제과 사장, 삼남 신춘호(辛春浩 1930.12.1 ~) 농심그룹 초대 회장, 사남 신선호(辛宣浩 1934.12.28 ~) 전 일본 산사스 식품공업 사장, 오남 신준호(辛俊浩 1941.11.1 ~) 푸르밀 회장이 있으며, 여동생들은 장녀 신소하(辛小荷 1926~2005), 차녀 신경애(辛敬愛 1928~), 삼녀 신경숙(辛敬淑 1933~), 사녀 신정숙(辛貞淑 1937~), 오녀 신정희(辛貞姬 1946~ 동화면세점 사장)가 있었다.
1935년 당시의 언양 보통 공립학교(현 언양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빈농인 아버지와 10남매의 양육이라는 가정형편상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다 큰아버지의 경제적 지원으로 당시의 울산농업 보습 학교(현 언양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1938년 울산농업 보습 학교를 졸업하면서 경남도립 종축장의 기수보(技手補)로 취직할 수 있었는데 기수보란 당시의 9급 기술직 공무원을 뜻하는 말로 당시 신격호의 주 업무는 양털 깎기와 양돈(돼지 기르기) 등의 축산업무였고 상당한 박봉이었다고 한다.
이후 당시 부산부 남빈 정(현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과 중구 광복동) 일대에 머물며 사업가의 꿈을 키우던 신격호는 1941년 부인 노순화(盧舜和 1922.8.10 ~ 1951. 5.16 , 광주 노 씨)와 둘 사이에서 낳은 장녀 신영자(辛英子 1942.10.16 ~) 전 롯데장학재단 · 롯데 복지재단 · 롯데 삼동 복지재단 이사장을 비롯한 가족들과 고향을 뒤로한 채 박봉에서 성공을 위해 부산항을 거쳐 일본으로 밀항을 했다.
그렇게 밀항에 성공한 신격호는 도쿄에 도착하여 단칸방을 빌려 낮에는 우유배달을 하면서 밤에는 와세다 실업학교 고등부의 야간부 화학공학과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고학 생활을 하며 어렵게 살아가던 신격호에게 1944년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보던 일본인 하나 미츠(花光)라는 사람이 5만 엔(현재 가치로 환산하자면 한국돈 30억 정도)의 거금을 빌려주며 공장을 운영해 보길 권한다. 이에 사업과 성공에 목말라 잇던 신격호는 전쟁 중에 수요가 모자랐던 밥솥과 절삭유를 만드는 공장을 차려 운영하였으나, 전쟁 중 공장이 폭격을 당해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이에 다시 하나 미츠에게 1만 엔의 자금을 융통받아 절삭유 공장을 운영하였지만 1년 반 만에 다시 미군의 폭격으로 공장은 문을 닫고 말았다.
1945년 8월 15일 신격호의 고향 한국은 전쟁을 마치고 광복을 찾았고, 하나 미츠도 신격호에게 살길을 찾아보라 위로를 하며 5만 엔과 이후 빌려준 추가 투자금액을 포기한다. 이렇게 자살을 떠올리는 상황에 까지 내몰렸지만, 빈손으로 고향의 가족에게 돌아갈 순 없고 죽을 때는 죽더라도 자신을 믿고 거액을 투자해준 하나 미츠에게 빌린돈이라도 갚아야 한다는 심정으로 빈손으로 다시 시작해 1946년 와세다 실업학교 고등부를 졸업하고 돈을 빌려 세탁, 세수비누, 포마드 크림 등을 만드는 유지류 가공공장을 운영한다. 솥단지 하나로 시작한 공장은 1년 반만에 하나미츠에게 빌린 돈을 모두 갚고 자신을 믿어준 것에 대한 감사 표시로 집 한 채 까지 덤으로 선물했다.
이후 신격호는 히카리 특수 화학연구소를 세우고 유지류나 특수 고무 등 화학 연구에 힘 쏟고 있었다.
그 히카리 특수 화학연구소에서 시판 껌들의 모든 장점을 집약하여 껌을 개발해 냈는데 이렇게 개발한 껌이 인기가 대단해서 당시 과자점 주인들이 서로가 앞다투어 납품받겠다고 신격호의 연구소 앞에서 새벽부터 줄을 서기 시작했다.
현재의 오픈런을 보는듯한 이런 광경을 본 신격호는 투자자를 모집하여 본격적으로 껌을 판매하기로 하고
1948년 현 롯데그룹의 모체인 (주)롯데를 창업했다.
이 시기 일본 정부가 불량식품 단속을 위해 제정한 '식품위생법'은 롯데의 성장에 원동력이 되었는데, 당시 롯데껌이 타 업체보다 품질이 앞서서 식품위생법 단속에 수혜자가 될 수 있었다. 점점 사업은 확장되어 1950년엔 신주쿠에 새 공장을 지어 기업의 기반을 다졌다.
당시 일본 껌 시장은 판껌계의 선두주자였던 '하리스'가 껌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신격호는 롯데의 주력 상품인 풍선껌 시장 외에 판껌 시장에도 진입해 맹 추격을 시작, 1953년엔 하리스를 따라잡았고, 1960년대까지 미스롯데 선발대회(1953년)나 TV광고 같은 홍보매체를 적극 활용해 롯데의 일본 껌 시장점유율을 70%까지 끌어올렸다. 이렇게 선발업체와 승부를 결정짓게 한 중요한 원동력은 미국 '리글리'사와 천연 치클을 50:50 비율로 확보하는 것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사실혼 관계의 다케모리 하츠코(竹森初子 1930.8.10 ~)와의 사이에서 형제 둘을 두었는데, 장남 신동주(辛東主 1954.1.28 ~ SDJ 코퍼레이션 회장)와 차남 신동빈(辛東彬 1955.2.14 ~ 롯데그룹 2대 회장)이다.
이후 1962년에 스위스 초콜릿 장인 막스 브락크까지 스카우트해 초콜릿 개발에 착수해 1964년 '가나초콜릿'을 선보였고, 1969년엔 캔디, 1972년 아이스크림까지 다른 식품 분야에도 진출 하기 시작하면서 더 나아가 롯데 애드, 롯데 부동산, 패밀리, 롯데리아 등 계열사 설립에도 힘쓰면서 기업의 다각화를 시도한다.
한편 광복 후 한국인들의 반일감정과 이승만 대통령의 반일 성향으로 한국은 일본과 단교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1965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한일협정으로 20여 년 만에 국교가 정상화되었다. 당시는 경제개발을 위해 해외자본 유치를 위해 노력하던 시기로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에서 제과 사업을 일으켜 성공한 신격호에게 정부가 외자도입법에 따라 지원을 해줄 테니 고국에 투자하라고 권유함에 따라 신격호는 한국으로 사업을 확장하기로 결심하고 1967년 4월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신격호 본인은 사장을 맡고, 회장에는 유창순 전 경제부 총리를 추대하여 사업을 시작했다.
설립 다음 해인 1968년 부산 거제동에 두 번째 출장소를 열어 사업을 확장하며 롯데제과는 일본에서 성공했던 경영 노하우를 기반으로 당시 동양제과, 해태제과, 크라운제과가 장악하고 있던 한국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1970년에는 껌과 과자의 포장 은박지 생산을 위해 동방알미늄을 인수해 '롯데알미늄㈜'으로 사명을 변경하며 수직계열화에도 나섰다.
이렇게 제과 회사로서 성장하고 있던 롯데와 신격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당시 서울에는 고급 호텔이 없어 국빈들이 방한했을 때 묵을 장소조차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국격을 위해서라도 서울에 고급호텔이 하나 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 여건상 고급호텔 사업은 수지가 맞지 않다고 여겨 기업들이 나서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1970년 서울시의 대대적인 부정식품 단속 결과 롯데제과의 껌에서 쇳가루가 검출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구실 삼아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던 신격호를 이용하여 호텔을 짓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1970년 11월 13일 정부는 롯데제과에 3개월 제조 정지 명령을 내렸고 같은 날 박정희 대통령은 도쿄에 머물고 있던 신격호를 청와대로 불러 서울에 호텔을 지어 호텔사업을 하면 롯데제과의 정지 처분을 해결해 주겠다고 제안한다. 신격호는 이 제안을 수락하여 1973년 '호텔롯데' 설립을 시작으로 1974년 정부의 반도호텔 민영화 공개입찰에 롯데가 단독으로 입찰하여 낙찰받고, 정부는 롯데호텔 부지 마련을 위해 정부 소유의 반도호텔과 국립중앙도서관을 신 회장에게 매각했다. 정부는 신격호에게 국립중앙도서관을 매각한 후 남산 어린이회관(현 서울특별시 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건물)으로 이전했다. 이 과정에서 부동산 취득세, 재산세, 소득세는 신격호가 일본에 거주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외자도입법에 근거하여 관련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그리하여 1979년에 '롯데호텔 서울'을 건설 중에 신격호는 롯데호텔 옆에 백화점을 짓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 정부가 도심 과밀화 억제 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하고 있던 때라 도심에 백화점 허가가 어려웠으나 외국인 투숙객을 위한 쇼핑 시설을 건설한다는 명분으로 허가를 받았고 이후 설계를 변경하여 당초 허가 때보다 훨씬 크게 지어 롯데호텔과 동시에 롯데쇼핑센터를 완공했다. 롯데호텔과 롯데쇼핑을 건립하면서 롯데는 제과업에서 유통업, 서비스업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했고 유통업을 통해 롯데는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1970년의 제조 정지 위기를 호재로 바꾼 롯데제과는 이후 급격한 매출 성장과 일본에서 성공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70년대 중반에 제과 시장의 최강자로 자리 잡았다. 또한 그렇게 얻은 자본을 기반으로 한 인수합병을 통해 식품업의 규모를 확장했다. 1974년 칠성한미음료(현 롯데칠성)를 인수했고 1977년엔 삼강산업(현 롯데푸드)을 인수하였으며 1978년 롯데유업까지 세워 종합 식품사업군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1973년에는 일본 '파이오니아'사와의 합작으로 롯데파이오니아를 세워 카세트, 오디오 등 음향 전자기기를 생산했다. 1980년 출시한 오디오 파이오니아는 큰 인기를 얻었다. 80~90년대 대한민국에서 오디오 붐이 불면서 각 가정마다 고가 오디오를 1대씩 장만하는 것이 유행하여 롯데 오디오는 인켈에 이은 국내 2위의 오디오 생산 업체로 식품 이외의 영역에서 사업 성공을 얻어 내기도 한다.
롯데에서 신격호는 1978년 그룹 회장으로 추대된 후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초창기 식음료 사업군 중심에서 서비스 산업 중심으로 점차 바뀌어 갔고 1997년 차남 신동빈이 부회장이 되면서 2세 승계 작업은 점차 속도를 더 해가는 중 외환위기가 찾아왔지만 롯데는 무차입 경영을 고수해 외환위기를 비켜나간 대기업 중 하나이다. 2011년에는 신동빈 부회장을 회장으로 승진시키며 자신은 '총괄회장'으로 추대됐다. 2017년 6월 24일 오전 일본 롯데홀딩스는 도쿄 신주쿠 하쓰다이 본사에서 주주총회를 열고 임기가 만료된 신 총괄회장을 새 이사진에서 배제한 인사 안을 의결했고 이에 따라 신 총괄회장은 1948년 (주)롯데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롯데그룹을 창립한 지 약 70여 년 만에 롯데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경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신격호 학력 및 출신학교
언양 보통 공립학교(현 언양초등학교) 졸업
울산농업 보습 학교(현 언양중학교)
와세다 실업학교 고등부의 야간부 화학공학과 졸업
신격호 그 외
신격호는 대한민국 1세대 재벌 총수 중 현대의 정주영과 함께 손꼽히는 자수성가형 재벌이다.
1세대 재벌 중에서는 지주의 자손으로 태어난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한진그룹 창업주 조중훈도 있고 적산기업(적국이 국내 또는 점령지에 남긴 재산)을 불하받아 재벌로 키운 사람으로는 SK의 창업주 최종건, 한화그룹 초대회장 김종희가 있다. 효성그룹의 조홍제, LG의 창업주 구인회, 허만정 역시 만석꾼 자손으로 태어났다. 반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밑바닥부터 고생을 해가며 재벌의 위치까지 성장한 사례는 현대의 정주영과 롯데의 신격호가 대표적이다.
신격호는 성공 이후 1971년부터 2013년까지 매년 5월 고향인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를 찾아 마을 잔치를 열었다. 신격호의 생가가 있던 이 마을은 1970년 대암댐 건설과 함께 수몰되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던 주민들은 집과 전답을 버리고 인근의 도시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격호는 1971년부터 마을 이름을 따 '둔기회'를 만들고 자비를 털어서 해마다 주민들과 그 가족들을 불러 마을 잔치를 열었다. 2014년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자 애도를 위해 중단하고, 원래 마을 잔치를 열려고 했던 잔치비용을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기부 했다. 2015년에는 더이상 마을잔치를 열지 않는다고 롯데 측에서 밝혔다. 이유는 해마다 늘어나는 잔치 참석 인원들로 인한 교통 불편을 주변 주민들이 호소했기에 중단했다고 한다.
신격호는 일본 교민회에서 조치훈 형과 인연이 있어 바둑기사 조치훈을 20년 이상 후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외에도 야구선수 박찬호, 권투선수 홍수환도 신격호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에서 활동했던 야구선수 장훈을 비롯한 재일 한국인들 중에서는 신격호 회장의 도움을 안 받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본인과 같은 처지에 처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다고 한다.
7~80년대 일본에서 유학하거나 사업 또는 외교를 할 때 별다른 인연도 없는데 한국에서 왔다고 도움받은 사람들이 많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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